• [2부]제3회 면앙정에서,,,(2) - 송순과 기대승의 인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20

제3회 면앙정에서(2) - 송순과 기대승의 인연

                                  
    이제  면앙정 현판 오른편 마루로 자리를 옮긴다. 이 마루 위에는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적힌 현판, 소쇄처사 양산보의 시가 적힌 현판, 정조임금의 어제 御題가 판각되어 있는 <하여 면앙정 荷與俛仰亭> 편액, 고봉 기대승의 <면앙정기> 등이  걸려 있다.

   먼저 송순과 소세양의 시가 같이 걸려 있는 현판을 본다. 소세양(1486-1562). 그는 송도의 명기 황진이와 진한 사랑을 한 사람이다. 그는 어떤 기생과도 같이 지내는데 30일간을 넘기지 않았는데 황진이 하고는 이 기약을 훨씬 넘겨 사랑에 푹 빠졌다 한다. 황진이는 소세양과 헤어지는 날 아래 시를 지어 소세양이 30일을 넘기도록 하였다는 시이다.


그리움만 남아   奉別蘇判書世讓

달빛 어린 마당에 오동잎은 지고
차가운 서리 속에 들국화는 누렇게 피어있네
다락은 높아 하늘과 한 척 사이라
취한 임은 무한정 술만 마시네.

흐르는 물소리 차가운 거문고 소리와 어울리고
매화 향기는 피리 소리에 스며드네.
내일 아침 우리 이별한 뒤에는
푸른 물결처럼 그리움이 길이 남겠지

    소세양은 명종 시절에 우찬성으로 일하다가 은퇴하여 말년을 전북 익산에서 살았다 한다. 그는 이곳 송순이 있는 면앙정에도 몇 번 들렀나 보다.  

   한편 송순과 소세양의 시와 소쇄처사의 시 사이에는 <하여면앙정 荷與俛仰亭>이란 어제 御題 (임금이 낸 시험문제) 편액이 붙어 있다. 이 편액을 살펴본다.

어제 御題

호남교준유생응제시제 湖南校準儒生應製試製

정조임금은 정조 22년(1798년)에 도과 道科를 광주에서 실시하라고 명하였다. 이 때 광주목사는 서형수이다. 시제 詩題는 ‘하여면앙정 荷與俛仰亭’이었다. 담양읍지에 가로되 송순의 아호는 기촌 企村인데 20세에 과거에 올랐으니 그 문장력은 당세에 표준이요 으뜸이었다. 네 분 임금을 섬기고 관직에서 은퇴하여 고향 땅 언덕 위에 정자를 지어 이름을 면앙정이라 하였으니 대개 면앙이라는 뜻은 우주를 두루 살펴본다는 뜻이다. 선생께서 임금을 사랑했던 충성심은 많은 시구에서 나타나고 있으며 급제에 오른 지 60주년 그날을 맞아 면앙정 위에서 베푼 잔치는 마치 급제에 오른 그 때와 같았으며 온 전라도가 떠들썩하였다. 술기운이 절반이나 취할 무렵 당시 수찬 정철이 가로되 우리 모두가 이 어른을 위해 죽여를 매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드디어 헌납 고경명, 교리 기대승, 정언 임제 등이 죽여를 붙들고 내려오자 각 고을 수령들과 사방에서 모여든 손님들이 뒤를 따르니 사람들 모두가 감탄하여 광영으로 여겼다. 이는 시로 옛날에도 없었던 훌륭한 행사였다.  

   송순은 1579년 그의 나이 87세 때 담양  면앙정에서 그의 과거 급제 60돌을 축하하는 잔치인 회방연을 열었다. 이 잔치는 임금도 술과 꽃을 하사할 정도로 성대하게 이루어졌는데 송순이 침소에 들려고 할 때 송강 정철이 송순에게 죽여를 직접 매어드리자고 제안을 하여 송강 정철(1536-1593), 제봉 고경명 (1533-1592),  고봉 기대승(1527-1572), 백호 임제 (1549-1587) 등 네 사람이 죽여(가마)를 직접 매였다고 한다.

  그런데 어제 御題에는 기대승도 죽여를 매었다고 되어 있으나 이는 잘못된 것이다. 기대승은 이미 7년 전(1572년)에 별세하였기 때문이다. 면앙집에 실려 있는 이 기록을 단순한 실수로 보아야 할까, 아니면 의도적인 기록이라고 하여야 할까. 나는 이 기록을 의도적인 기록으로 생각한다. 송순의 회방연에 고봉 기대승이 참석한 것이면 그만큼 그 잔치의 명성이 더 높을 것이라는 생각에서 의도적으로 참석자 명단에 고봉을 넣었으리라는 생각을 한다. 16세기 중엽의 고봉 기대승의 명성은 대단하였다. 특히 퇴계 이황과의 8년간에 걸친 사단칠정론 편지 왕래로 인하여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다.  

  한편 어제 바로 앞에는 고봉의 <면앙정기> 편액이 걸려 있다. 몇 년 전에는 편액이 없었는데 최근에 행주 기씨 문중에서 걸었다 한다. 이 면앙정기는 한문으로 되어 있어 자세한 내역은 알 수 없다.

   송순은 1552년, 그의 나이 60세에 담양부사 오겸의 도움을 받아 면앙정을 다시 짓는다. 그리고 스스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고 땅을 내려다보기도 하며 바람을 쐬면서 남은 생애를 보내게 되었으니 나의 본래 원하는 바가 이제야 이루어 졌다’라고 기뻐하였다. 그는 고봉 기대승에게 <면앙정기 記>를 백호 임제에게 <면앙정부賦>를 지어 달라고 부탁한다.

  고봉 기대승과 송순과의 인연은 고봉의 나이 18세 때 이루어진다. 당시 기대승은  광주목사로 있던 51세의 송순을 만나 광주 향교에서 공부를 한다.  고봉이 직접 쓴 <자경설>에 나와 있는 글을 읽어 보자.
  
  16세에《주역周易》을 읽었는데 침식을 잊을 정도로 매우 열심히 연구하였다. 17세에는 전한서前漢書》ㆍ《후한서後漢書》 및 《여지승람 輿地勝覽》을 읽었다.  18세인 1544년에 중종이 승하하자, 졸곡 때까지 곡림 哭臨하고 소식 素食하였다. 또한 목사 송순 宋純이 유생 儒生 가운데 더 배우기를 청한 자들을 선발하여 글을 강송 講誦하도록 하고, 반드시 그 강송하기 시작한 때를 기록하여 기간이 오래 되었으면 곧 학업 성취도의 여하를 심사하곤 하였다. 나는 맹자와 한유의 글을 읽었다 (후략 )
                          
    면앙정에 대한 중수내역과 그 배경 등에 관한 산문인 <면앙정기>는 기대승의 나이 32세인 1558년에 송순이 완산(지금의 전주)부윤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지어졌다. 그는 산문 솜씨가 탁월하였다 한다. 이 <면앙정기>도 명문중의 명문이다. 원래 고봉이 지은 <면앙정기>는 두 가지이다. 국역 고봉전서에도 면앙정기가 두개가 번역되어 있다.

    한편 송순은 임제에게 면앙정부 俛仰亭賦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백호 白湖 임제 林悌(1549-1587). 그는 39세의 나이에 요절한 조선 최고의 풍류객이다. 그는 나이 35세 때 평안도 도사(종6품)로 부임하면서 송도의 황진이의 묘에 들러 관복을 입은 채로 술잔 올리고 제 지내며 추도시를 읊었다 하여 조정으로부터 파직을 당한 로맨티스트이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난다 누웠난다.
홍안을 어디 두고 백골만 묻혔난다.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허하노라.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시조를 양반 신분에 당시에 천시 받던 기생의 무덤 앞에서 예를 갖추고 읊었으니 자유분방함이 가히 풍류객답다. 임제는 전라남도 나주시 회진면 사람으로서 자는 자순 子順이고 호는 백호 白湖인데 어렸을 때는 규방 출입등을 하다가 나이 20세에 학문에 뜻을 두어 29세에야 과거에 급제한 후 벼슬을 시작하였다. 그는 자유분방하고 기개 있는 풍류객으로 알려져 있는데 동서분당의 무리에서 초탈하여 굽혀서 남을 섬기기를 좋아하지 아니하였고 격식과 현실에 비판적이었다. 대곡선생 성운의 제자로 알려져 있는 임제는 면앙정 송순의 제자이기도 한데 그는 무인으로서 칼과 거문고를 항상 가지고 다니며 호방함을 보여 그가 다니는 곳에는 여인과의 일화가 뒤따랐다.

   면앙정부 俛仰亭賦는 1576년 임제의 나이 27세에 지어진 것이다. 면앙집 제3권에 보면 84세의 송순은 1576년 5월18일에 임제에게 부를 지어달라는 부탁을 하는 편지를 쓴다. 그리고 같은 해 6월 16일에 임제에게 글을 써주어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쓴다.

   기 記가 이성적이고 지적인 글이라면 부 賦는 감성적이고 미적인 글이다. 그래서 송순은 철학적이고 사변적인 기대승에게는 기를 부탁하고,  감성적이고  로맨틱한 임제에게는 부를 지어달라고 부탁한 것이리라.    

  정자를 구경하고 나서  면앙정 안내판과 중수비 그리고 면앙정기 비석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간다.  면앙정기 비석은 금년 봄에 기씨 문중에서 세웠다. 면앙정기 비석은 앞면에는 한글 번역이 뒷면에는 이 비를 세운 취지가 적혀 있다. 한글 면앙정기는 < 국역고봉전서>의 번역본을 그대로 옮긴 것 같다.

   이제 면앙정을 내려온다. 그리고 송순과 기대승의 인연에 대하여 다시 한 번 생각한다. 몇 백 년 전에 지은 <면앙정기>가 남아 있지 않다면  두 사람간의 인연의 깊이를 헤아리기 어려울 것이었으리라는 생각도 하면서 기록의 중요성도 같이 느낀다.  

   참고로 이 글을 마치면서 기대승의 면앙정기 俛仰亭記 번역 글을  옮긴다.

  기대승의 면앙정기  

  큰 허공에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땅은  한낱 한 덩어리의 흙덩이인데 이것이 깊어져서 강이 되고 우뚝하여져서 산이 되었다. 그리고 그 하나의 흙덩이에서 강물이 흐르고 산맥이 뻗어 내렸다.
  인간이란 하늘의 명을 받고 땅의 정기를 받아 산수간 山水間에 놀고 거처하는 데 눈으로 보면 사랑스러울만하고 귀로 들으면 즐거운 아름다운 경치를  조물주가 인간에게 제공하여 주는 듯하다.
  그러나 유람지로서 적당한 곳을 구하여 볼 때 나의 귀와 눈에 싫지 않는 것으로 말하면 반드시 높은 산을 넘고 아득한 곳으로 나간 뒤에야  그  온전한 곳을 찾을 수가 있을 것이다. 만일 수 백리 넓은 들판에 기이한 산수가 있다면 나는 이 언덕 위에 올라 앉아 노닐며 즐거워하고 싶건만 어찌 해야 할 것인가.
  지금 완산부윤(完山府尹=전주시장)으로 있는 송공 宋公이 사는 집 뒤 끊긴 기슭의 벼랑에 정자를 세우고, 이름을 면앙정  俛仰亭이라 했으니 앞서 말한 바대로 놀기에 적당하고 즐거움이 완전하다는 것들이 모두 갖추어져 있어  다른 곳에서 구할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처음에 공의 선조 중에 한 분이 연로하여 벼슬자리에서 물러나 기곡리 錡谷里에서 거주하였기에 자손이 대대로 살았으니 노송당 老松堂의 옛터가 남아있다.
  기곡리에서 북쪽으로 2∼3리도 채 못 되는 곳에 조그마한 마을이 있는데 산을 등지고 양지바른 곳에 있으며 토지가 비옥히고 샘물이 좋다.
  이 마을 언덕 위에 집이 하나 있으니 공이 지은 것으로 마을 이름은 기촌 企村이라고 한다.
  기촌의 뒷산은 서려있고 울창하며 가장 빼어난 봉우리는 제월봉 霽月峰이라고 한다.
  기촌에서 북쪽으로 뻗어 내린 제월봉 능선에는 용이 서린 듯하고 거북이가 고개를 쳐드는 것 같이 구불구불하고 높이 솟아 있는 곳이 있으니 이곳에 바로 면앙정이 있다.
  면앙정은 모두  3칸 건물로 긴 상량 上樑을 얹어서 상량이 도리보다 배나 높다.  
  그러므로 그 가운데를 보면  단정하고 확 트였으며 판판하고 바르며 그 모서리는 깎아지른 듯 하여 새가 날개를 펴고 나는 듯하다.
  사면을 비우고 난간을 세웠으며 난간 밖은 지형이 다 약간의 벼랑인데  서북쪽은 특히 절벽이다. 뒤에는 대나무가 병풍처럼 둘러 있고 아래에는 삼나무가 무성하다.
  정자 아래에는 암계촌 巖界村이라는 마을이 있는데 산에 돌이 많고 깎아지른 듯이 험악하므로 이름을 암계촌 巖界村이라고 이름 한 것이다.  
  동쪽 뜰 아래에는 약간 아래로 내려간 산세로 인하여 확 터놓고  온실 4칸을 지은 다음 담장을 둘러치고는,  아름다운 화초를 심어놓고 방안에는 서책 書冊으로 가득 쌓아 놓았다.
  산 능선을 따라 좌우 골짜기에는 소나무와 무성한 나무들이 울창하게 서 있다. 정자가 있는 곳은 이미 지형이 높아 한층 더 상쾌하게 보이고 대나무들이 둘러싸고 있어서 인간세상과 서로 접하지 않으니 아득하여 마치 별천지 같다.
  빈 정자 안에서 바라보면 그 시원한 모습과 우뚝 솟은 산세가 이어져 구불구불 하는 듯 하고 뛰어서 나오는 듯 하니 마치 귀신이나 이상한 물건이 남몰래 와서 흥취를 북돋아 주는 듯하다.
  정자의 동쪽에는 제월봉이 있는 데 이 산은 우뚝 솟았으며 그 한 쪽 가지가 편편하고 구불구불하여 서쪽 큰 들에 임하여 이 삼십리 사이에 뻗쳐 있는 데 모두 여섯 구비이다. 정자의 뒷산에는 동서남북 수백리 거리에 높다란 산이 겹겹이 쌓여 있다.
  산 이름을 기록하자면 기암괴석이 높이 솟아 있는 산은 용구산 龍龜山이요, 발돋움하여 우뚝 서 있는 산은 몽선산 夢仙山이며, 기타 옹암 甕巖, 금성 金城, 용천 龍泉, 추월 秋月, 백암 白巖, 그리고 불대 佛臺, 수연 修緣, 용진 湧珍, 어등 魚登, 금성 錦城산 등 여러 산은 마치 곡식 창고와도 같고 혹은 성곽 城廓같기도 하며 병풍 같기도 하고 언덕과도 같으며 와우 臥牛같기도 하고 마이 馬耳같기도 하다.
  이 모두가 눈썹처럼 검푸르기도 하고 상투처럼 뾰족뾰족하기도 하며 숨었다 드러났다 하기도 하고, 아득하게 보이다가 보이지 않기도 하다.
  그리하여 형태가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가 하면 기후는 겨울이 겨울 같지 않고 여름이 여름 같지가 않아 마치 기인(畸人=기이한 사람)이 요술을 부린 것도 같고 열부 烈婦가 절개를 지키는 것도 같아서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오래오래 생각하도록 한다.
  물이 옥천 玉泉에서 근원하여 나온 것은 여계라고 하는 데  이 물이 바로 면앙정 뒤 기슭 앞을 감돌아 편편히 흐르는데, 물이 맑으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장마에도 넘치지 않는다.
  마치 양양하고 유유하여 흘러가면서도  멈춰 있는 것 같고 저녁노을에 고기들이 텀벙거리고 가을 달빛 아래에 백로가 날아든다.
  그리고 용천 龍泉의 하얀 물은 담양읍 쪽에서 구비치며 흘러내리다가 옥천 물과 함께 한 마장 쯤 서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서석산(무등산)에서 발원한 물줄기는 정자 왼쪽 세 번째 구비의 밖으로부터  비로소 모습을 보이는 데, 아래로 흘러 앞의 두 시냇물과 합류하여 바로 용산 龍山에 이르러 혈포로 흐른다.
  아득한 큰 들은 추월산 아래에서 시작되어서 어등산 밖까지 뻗쳐 있는 데 그 사이에는 도랑과 밭두둑이 널리 널려 있고 마을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농부들은 그 사이에서 봄이 오면 밭갈이 하고 여름이 면 김을 매며, 가을에는 수확하면서 잠시도 쉬는 시간이 없으며, 사계절의 풍경 또한 이처럼 무궁히 펼쳐진다.
  한 폭의 천으로 만든 두건을 쓰고  짧은 잠방이를 입고서 난간위에 기대고 있노라면 높은 산과 먼 시냇물 그리고 떠도는 구름과 노니는 새와 짐승과 물고기 등이 자유롭게 와서 내 흥취를 돋운다.
  청려장 靑藜杖 지팡이 짚고서 조용히 뜰아래를 거니노라면 푸른 연기는 저절로 멈추어 있고, 맑은 바람은 불어온다.
  소나무와 회나무에서는 바람소리 들리고  꽃나무는 향기를 뿜는다. 이렇듯 육신을 잊어버리고  조물주와 즐겁게 놀고 있으니 어찌 아름답다 아니할까.
  아 ! 아름답다 이 정자여. 그 안에 있어 보면 빙 둘러 있는 산과 그윽한 경치를 두루 잘 보겠고, 그 밖을 바라보면 아득한 창공은 가히 호탕한 외모를 풍기니,  옛날 유자(柳子: 중국의 문장가 유종원을 말함)의 말대로 “놀기에 적당한 것이 대개 두 가지가  있다”고 한 것은  아마 이런 것을 말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내가 일찍이 정자에 올라 공을 면앙정에서 뵈었더니 공은 나에게 말하기를 “이 정자를 짓기 이전에 이곳에서 곽씨 郭氏라는 분이 살았는데 하루는 곽씨가 이상한 꿈을 꾸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어대 魚帶를 띤 선비들이 이곳에 모여 앉아있는 꿈이었다.”고 한다.
  이어서 공이 나에게 말하기를  “곽씨는 자기 집안이 장차 크게 잘 될 징조라는 생각에서  노승에게 아들 글공부를 부탁하였건만 그 아들은 성공하지 못하고 가세 역시 곤궁하게 되자 그는 살 곳을 옮겨 갔다.
  그리하여 내가 이 터를 취득하게 되었는데 지난 갑신년(1521)에 재산과 돈이 많은 마을 사람들이 나를 찾아와 서로 축하한다며 하는 말이 「기특한 이 땅을 공께서 취득하셨으니 이전 날 곽씨의 꿈속에 오늘날의 징조가 있었다.」고 하였다.
  나 또한 이곳 산수를 사랑했지만 관직에 있는 몸이라서 어쩔 수가 없었고 그 뒤 계사년(1533)에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와 비로소 햇볕을 가린 정도의 초정 草亭을 세워 5년이라는 세월을 즐겁게 놀다가 다시 조정으로 들어가게 되자 정자는 비바람에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고 초목만 무성해지고 말았다네.
  경술년(1550)에 관서 關西 지방에서 귀양살이 하는 몸이라 온갖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기에 이곳에 정자를 다시 세우지 못한 것이 만년의 한이 되었는데, 다행히 신해년(1551)에 나라의 은혜를 입고 귀양살이에서 풀려나와 지난날 가졌던 계획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고 싶었지만 재력이 없어 하루하루 생활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때마침 담양부사 오겸 吳謙이 찾아와 이곳을 함께 관람하고 나에게 정자를 지으라고 권고하면서 협조하겠다고 하였다네.
  그리하여 임자년(1552) 봄에 공사를 시작하여 몇 달이 지나지 않아 공사를 끝내니 정자는 제 모습을 드러내고 좌우의 숲들은 한층 더 싱그럽게만 보였네.
이 정자에서 나의 여생을 보내고 싶은 소원을 이루었으니, 아! 내가  이 땅을 취득한지 이제 30여년이 되었건만 그 사이 인간사의 얻고 잃음은 진실로 말하기 어렵고, 정자가 무너졌다가 다시 세워졌으니 이 또한 운수가 있다  하겠네.
  이 일을 살펴보면 감회가 절로 나니 이 일을 기록하지 않을 수 없네. 자네에게 부탁하니 자네가  나를 위해 면앙정기를 지어 주게나. “
  이에 나는 글 솜씨가 부족하므로 한사코 사양하였으나 공은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는 다시 공에게 말하였다. “ 저 푸르른 하늘을 누가 우러러보지 않으며, 아득한 이 땅을 누가 고개 숙여 보며 서지 않을 것인가.
  그러나 이 세상에는 그러한 줄 알면서도 능히 자신에게 돌이킬 줄 아는 사람은 적다고 할 것입니다.
  이제 공은 이미 마음속에 느낀 바를 정자 이름으로 지었으니 이런 호연지기 浩然之氣는 진실로 일반인으로서는 감히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물의 변화는 무궁하고 인생이란 끝이 있는 것이니, 끝이 있는 인생으로서 다함이 없는 변화를 지켜나가기 위해서는 땅을 굽어보고 하늘을 우러러보는 사이에 천지의 영허 靈虛함과 인물의 영쇄하는 이치를 또한 가히 마음으로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을 것이니 그렇게 위해서는 스스로 노력해야 할 것이요.
  어찌 산수의 승경만을 즐거워 할 것인가.
  아 ! 우리 공이 아니면 그 누가 능히 이 정자 이름처럼 면앙 俛仰이라는 이름을 감당하리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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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부]제3회_사진첩.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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