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4회 두보처럼 살아간 재상 시인, 박순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4회 두보처럼 살아간 재상 시인, 박순

 

- 경기도 포천시 옥병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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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천시 옥병서원)

 

1586년에 벼슬에서 물러난 박순은 영평현, 지금의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의 백운계곡(白雲溪谷) 창옥병(蒼玉屛)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촌부처럼, 당나라 시인 두보(712~770)처럼 살고 싶었다. 주1)

 

살 곳을 정하다

 

동쪽으로 가는 차림이 가래 삽 하나뿐이라.

소릉(두보)이 죽은 후에 사암(박순)이 또 있네.

백발을 쓸어버릴 것으로 황정 黃精이 있으니

가을 산 푸른 산 기운 속에 캐기도 좋겠네.

 

박순은 배견와(拜鵑窩)라는 초가를 지었다. 청령담(淸泠潭) 서쪽에 있었는데 배견와는 ‘두견에게 절을 하는 움집’이란 뜻이다. 주2)

 

언덕 높은 곳에는 이양정(二養亭)도 지었다. 정자 이름은 ‘덕과 몸 두 가지를 기른다(二養)’는 송나라의 도학자 정이천(程伊川 1033~1107)의 뜻을 취하였다.

 

박순은 창옥병 앞의 아름다운 청령담에 있는 여러 바위와 벼랑에 이름을 붙이고 당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 1543~1605)의 글씨를 받아 일일이 새겼다. 청학대(靑鶴臺)ㆍ백학대(白鶴臺)ㆍ산금대(散衿臺)ㆍ수경대(水鏡臺)ㆍ토운상(吐雲床)ㆍ와존(窪尊)등이 그렇다. 주3)

 

 

박순은 이양정기(二養亭記)와 배견와, 창옥병 등에 관한 시를 지었다.

 

 

이양정 벽에 쓰다 題二養亭壁

 

골짜기에 새소리만 때때로 들려오고

쓸쓸한 침상에는 책 여러 권이 흩어져 있네.

언제나 백학대 앞의 물이

산 문 山門 앞을 나가자마자 흙탕물에 섞여 한스러워라.

 

배견와 (拜鵑窩)

 

배견와 안의 두견을 존경하여 절하는 늙은이

밤마다 창문에 기대어 듣는 재주 좋구나.

노쇠와 질병의 두 가지가 내 몸을 재촉하니

천 줄기의 눈물을 백화 속에 뿌려본다.

 

창옥병 (蒼玉屛)

 

상제가 곤륜산의 천 길 석골 石骨 오려내어

온갖 신령이 분주하게 새기고 깎는 수고를 했네.

높고 험하게 거꾸로 꽂혀있는 바다거북의 굴을

사암(박순의 호)으로 하여금 세상에 나와 보게 하였구나.

 

박순의 시는 마치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것 같다. 시중유화(詩中有畵). 시 속에 정경(情景)이 다 보인다.

 

박순은 두보처럼 살았다. 시사(時事)를 논하는 일이 없었고 시골 노인들과 더불어 술 마시고 촌부처럼 살았다.

 

두자미가 일찍이 무협(巫峽)의 일을 시로 썼는데

내가 지금 이곳에 오니 그와 같아졌네.

산울타리 세운 곳에선 힘들여서 호랑이를 막고

벼랑에서 석청 꿀을 거두려면 멀리서 벌이 날아가길 기다리네.

봄날의 흥겨움 春日漫興 四首

 

두보는 술을 즐겼지만 돈이 한 푼도 없어

집안 식구 거느리고 떠돌아다니는 것을 술 취해 잠자는 셈 쳤네.

나는 아직도 내려주시는 녹봉 받을 수 있으니

어찌 봄이 가는 데 술 깬 축에 끼어 있으랴.

 

수없이 많은 복사꽃이 가는 곳 마다 만발해

사람마다 술에 취해 봄바람에 답하네.

나는 이제 늙고 게을러 잠자고 싶은 생각뿐이라.

짙붉은 꽃이 연붉은 꽃에 비춰도 내버려두네.

 

 

이렇게 살았지만 박순은 외로웠다. 정승을 내리 14년간이나 하였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세상 인심이란 원래 그런 것이다.

 

그런데 영광(지금의 장성)출신 죽곡 이장영(1522-1581)이 찾아왔다. 이장영은 1586년에 선공감정 繕工監正 이었는데 이 무렵에 경차관(敬差官)이 되어 박순을 찾아 온 것이다. 박순은 기뻤다, 그리고 시를 지었다. 주4)

 

이장영이 경차관으로 찾아오다.

 

누가 생각이나 하였으랴. 훌륭한 말 타고 골짜기에 찾아오리라고.

산새들을 화려한 비녀로 놀라게 만들었네.

그윽한 거처에 일이 없어 사람도 찾아오지 않기에

문 앞을 쓸지 않아 낙엽이 수북하였네.

 

박순은 최고의 서정 시인이었다. 느낌대로 진솔하게 시를 잘 지었다. 1568년에 명나라 사신 장조와 구희직(歐希稷)이 조선에 왔을 때 박순은 예조판서로 접빈사가 되었는데, 명의 사신 장조와 구희직이 박순의 시를 보고 "송대(宋代)의 인물이요, 당(唐)의 격조이다.”라고 칭송하였다.

 

성리학이 주류인 송나라 시대에는 시를 짓는 것도 격식을 따졌다. 그런데 박순은 투박 ․ 진솔함을 지향하였다. 두보처럼 인간미 넘치는 당풍(唐風)의 시를 지었다.

 

이 중에서 절창의 하나로 꼽히는 시는 ‘방조운백(訪曹雲伯 조처사의 산속 집을 찾아가면서)’ 이라는 시이다.

 

취하여 자다 깨어보니 신선의 집인가 싶은데

넓은 골짜기에 흰 구름 가득하고 마침 달이 지는 구나

서둘러 홀로 걸어 쭉쭉 뻗은 숲 밖으로 나오니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자던 새가 알아듣네.

 

醉睡仙家覺後疑 취수선가각후의

白雲平壑月沈時 백운평학월심시

翛然獨出脩林外 수연독출수림외

石逕笻音宿鳥知 석경공음숙조지

 

 

참으로 명시 名詩이다. ‘돌길의 지팡이 소리를 간밤에 자던 새가 듣더라’는 시 구절이 얼마나 유명했으면 박순의 닉네임이 ‘박숙조(朴宿鳥)’

‘숙조지(宿鳥知) 선생’이었을까. 이수광의 '지봉유설'에 나오는 일화이다.

 

박순은 손곡 이달(?-?), 고죽 최경창(1539-1583), 옥봉 백광훈(1537-1582)등 삼당시인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주5)

유희경(1545-1636)도 박순에게 시를 배웠다. 허균의 스승인 이달은 서얼이요, 부안 기생 매창의 연인 유희경은 천민출신인데도 박순은 신분으로 사람을 가리지 않았다. 주6)

박순의 시 중에는 면앙정 30영 등 호남의 자연을 읊은 시도 많다.

면앙 송순(1493-1583)을 위하여 지은 면앙정 30영중에서 ‘서석산

아지랑이’를 읊어 보자. 주7)

 

 

수풀 밖으로 멀리 내다보니 바위 형세가 웅장하고

아지랑이 퍼진 기운이 개인 하늘에 가득하네.

술에 취한 붓 오래 멈추고 자주 머리를 돌려

저녁노을이 다시금 엷게 물들기를 기다리네.

 

 

1589년 7월에 박순은 백운산 시냇가에서 세상을 떠났다. 죽는 날도 베갯머리에 기대어 시 읊기를 그치지 않다가 갑자기 신음하더니 부인 고(高)씨에게, “내가 가오.”하고는 홀연히 운명하였다. 박순은 창옥병과 금수정이 바라다 보이는 뒷산 종현산에 묻혔다. 주8)

 

박순과 절친하였던 우계 성혼(1535-1598)이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만시(輓詩)를 지었다.

 

세상 밖 구름 덮힌 산은 깊고 또 깊으니

시냇가에 초가집은 벌써 찾기 어려워라

배견와(拜鵑窩) 위에 뜬 한 밤의 달은

응당 선생의 일편단심을 비추리.

 

 

世外雲山深復深 세외운산심부심

溪邊草屋已難尋 변계초옥기난심

拜鵑窩上三更月 배견와상삼경월

應照先生一片心 응조선생일편심

 

 

성혼은 앞의 2구에서 깊은 산골 영평 땅에 주인 없는 집만 남아 있는 모습을 그리고, 뒤의 2구에는 배견와 위에 뜬 삼경의 달이 임금에 대한 일편단심 같다고 표현하였다.

 

당대 최고의 비평가 허균(1569-1618)은 <성수시화>에서 “박순이 돌아가시자 만가(輓歌)가 거의 수백 편이나 되었는데 특히 성혼의 절구(絶句)가 절창이었다.”라고 하면서 “무한한 감상(感傷)이 말의 표면에는 드러나지 않으니 서로 간에 깊이 아는 사이가 아니라면 어찌 이런 작품이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담양 송강정에서 지내고 있는 송강 정철도 박순의 부음을 듣고 이렇게 통곡하였다.

 

나는 떼를 잃은 기러기 같네

이 몸을 어느 곳에 의탁하리오.

외로이 나는 갈대밭 사이에

그림자 찬 구름과 함께 사라지도다.

 

서인의 영수 박순마저 죽었으니 서인들은 길 잃은 기러기였다. 주9)

 

박순은 적통 嫡統에게서 아들이 없고 딸만 하나 있었다. 주10)

그는 딸아이가 꽃을 가지고 노는 모습이 너무 예뻐 시를 지었다.

(觀女兒弄花戱題)

 

딸아이 똘망똘망한 게 겨우 젖 떨어져

예쁘게 빨간 치마 입고 마냥 좋아하는구나.

웃으며 해당화 한 잎을 따서는

귀여운 이마에 부치고는 연지라고 하네.

 

 

박순의 묘소는 경기도 포천시 창수면 주원리에 있다. 근처의 옥병서원에는 그의 신위가 모셔져 있다. 옥병서원 앞 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었다. 아울러 광주광역시에 송호영당, 나주시 노안면 금안리 월정서원에도 박순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주11)

 

 

14년간 내리 재상을 한 박순. 너무 겸손하여 성호 이익으로부터 ‘사암능양’이란 명성을 얻은 절창의 시인 박순. 그는 정녕 겸손과 진솔의 표상이었다.

 

 

사진 1-3 경기도 포천시 옥병서원

 

 

 

주1) 경기도 영평현(永平縣)은 지금의 포천시 창수면 ․ 일동면 ․ 이동면 일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11권에 나와 있다.)

 

박순의 사직은 선조수정실록 20권, 19년(1586년) 12월 1일자 기사에 나와 있다.

 

영부사 박순이 사직하다

 

영부사 박순이 사직하였다. 박순의 본가는 호남이었는데 이때에 와서 감히 멀리 돌아가지 못하고 영평(永平)의 산 속 백운계(白雲溪) 가에 거처를 정하고 그 집을 배견와(拜鵑窩)라 이름하였다. 그곳에는 천석(泉石)의 경관이 빼어났는데, 박순은 날마다 촌부들과 함께 낚시질로 소요하였고, 멀리서 학자들이 찾아오면 언제나 가르치기를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입으로는 아예 세상사를 말하지 않아 마치 포의(布衣) 시절처럼 한가로웠다.

 

상이 여러 번 불렀으나, 그때마다 모두 사양하였는데, 상이 하유하기를, “경이 사직하는 상소를 보니, 경이 종적을 거두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려는 것을 알겠다. 그러나 경의 처지로 볼 때에는 괜찮겠으나 한 시대의 기상이 좋지 않은 데에는 어찌하겠는가. 전에 경을 서울로 올라오도록 독촉하여 초야에서 묻혀 있게 하지 않았던 것은 경만을 위한 것은 아니였다. 교지가 이르는 즉시 올라와 서울에서 머물도록 하라.”

하였다. 그러나 박순은 또 다시 사양하고 오지 않았다.

 

주2) 두견(杜鵑)새는 중국 전국시대(戰國時代) 촉나라 망제(望帝) 두우(杜宇)의 혼이 깃든 새로, 망제 또는 두우 ․ 촉혼, 두혼으로 불리기도 하고, ‘초나라에 돌아오길 바란다.’는 귀촉도 歸蜀道, ‘돌아가는 것만 못하다.’는 불여귀 不如歸라고도 부른다. 보통 소쩍새라고 한다. 두견(杜鵑)새는 자규(子規)라고도 하는데 봄과 여름 사이에 처절하게 울어댄다.

 

주3) 박순은 이양정기(二養亭記)를 1588년에 지었다. 이 글은 <사암집 (思庵集)>에 수록되어 있다.

 

주4) 죽곡 (竹谷) 이장영(李長榮 1522-1581)은 1558년(명종 1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승문원 정자가 되었고, 장흥 ․ 함양 ․ 광주 ․ 성주의 수령을 하였다.

 

이장영은 장성군 삼계면 수옥리 수강사에 송흠과 함께 배향되었는데 지금은 수강사는 없어지고 비석만 남아 있다

 

주5) 안대회 교수는 이달을 애상과 절망, 백광훈을 우수와 비애, 그리고 최경창을 기개와 풍류의 시인으로 부르고 있다. 1582년에 옥봉 백광훈(1537-1582)이 서울에서 죽었을 때 박순은 만시를 썼다. 영의정 시절이었다.

 

 

백옥봉 만시

 

해진 책과 깨진 벼루는 외로운 널을 따라가고

아득한 나그네 혼은 은하수 나루를 건너가네.

예부터 재주 있으면 운명이 많이 기박해서

부질없이 진기한 보물을 궁벽한 진토에 버려지게 했네.

 

주6) 부안 기생 매창(1573-1610)과 유희경은 1590년에 처음 만난 후 헤어진 뒤에 1607년에 다시 만났다. 매창의 유희경을 그리는 시조는 너무 유명하다.

 

이화우 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에 저도 날을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하괘라.

 

주7) 면앙 송순(1493-1582)은 지지당 송흠과 눌재 박상의 문인으로 1519년에 문과 급제하고 우참찬까지 했는데, 41세 된 1533년에 담양군 봉산면 제월리에 면앙정을 지었다. 면앙정은 기대승이 면앙정기를, 임제가 면앙정부를 지었고, 김인후 ․ 임억령 ․ 박순 ․ 고경명 등이 면앙정 30영을 지었다.

 

1569년에 박순이 이조판서가 되었을 때 송순은 “사암이 조정에 있는 동안에는 청탁이 없어지게 되었다”면서 기뻐하였다.

 

주8) 선조수정실록 23권, 22년(1589) 7월 1일자 기사에는 박순의 졸기가 실려 있다.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의 졸기

 

전 의정부 영의정 박순(朴淳)이 졸(卒)하였다.

박순의 자는 화숙(和叔), 호는 사암(思庵)이다. 박순은 타고난 자품이 청수(淸粹)하여 마음이 평탄하고 화평하여 남과 대립이 없었다. 일찍부터 서경덕(徐敬德)에게 수학(受學)하고 이황(李滉)과 교유하였다. 이황이 항상 칭찬하기를,

“박순과 상대하면 마치 한 덩이 맑은 얼음과도 같아 신혼(神魂)이 아주 상쾌하다.” 하였다.

 

어려서부터 문장과 행검으로 소문이 났다. 명종이 친시(親試)하여 급제시키고 기대함이 매우 중하였다. 그래서 관각(館閣)에 있을 적에 권신(權臣)의 뜻을 거슬러 중한 형률(刑律)로 논죄하였으나 파면하는 데에 그쳤다. 명종 말년에 다시 발탁 기용되어 두 권신(權臣)을 탄핵하여 내치니, 사론(士論)이 비로소 신장되고 조정이 엄숙하여져 선류(善類)의 종주가 되었다. 노수신과 함께 정승이 되어 정승의 자리에 있은 것이 14년이나 되었는데, 두 사람이 모두 명망이 중하였으나 사람들이 건명(建明)한 바가 없는 것을 결점으로 여겼다, 그러나 박순은 스스로 경국제세(經國濟世)에 부족하다 하여 오로지 어진 사람을 천거하고 능력있는 사람에게 양보하였으므로 이이와 성혼을 힘껏 천거하였고 시종 협력하여 일을 처리하였다. 당론(黨論)이 나뉘어지게 되어서는 박순은 이이와 성혼을 편든다 하여 탄핵을 많이 받았는가 하면 간사한 사람으로 지목하면서 ‘세 사람은 모양은 다르나 마음은 하나다.’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상이 이르기를, “선류(善類)끼리 상종하는 것이 도에 무슨 해로움이 있겠는가.”하였다. 물러나서도 오히려 상의 권념(眷念)이 쇠하지 않았다.

 

이때에 졸하니 나이 67세였는데, 조야(朝野)가 애석히 여겼다. 박순은 문장에 있어 한당(漢唐)의 격법(格法)을 추복(追復)하였고 시에 특히 능하여 또한 한 시대의 종주였는데, 최경창(崔慶昌)·백광훈(白光勳)·이달(李達) 등이 모두 그의 문인이었다. 이로부터 문체가 크게 변하였다. 《사암짐(思庵集)》이 세상에 유행한다.

 

주9) 한편 정철을 비롯한 서인은 1589년 10월 정여립 모반사건(기축옥사)로 기사회생하였다.

주10) 박순은 적통을 이은 아들이 없었다. 서자 박응서가 있었지만 그는 광해군 때 조령에서 은상 銀商을 털려다 적발된 일곱 명의 서자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서얼 동지들을 모아 소양강가에 살면서 무륜당이라 하고 홍길동전의 저자였던 허균과 연결하여 개혁을 시도하다 칠서의 난에 잡혀 처형되었다. (조선왕조실록 1613년(광해군 5년) 4월25일자 참조)

 

주11) 나주시 금안리 마을 쌍계정에도 박순의 시가 걸려 있다.

또한 장성군 북일면 월계리 오정마을 개천정사에는 박순이 하곡 정운룡(1542-1593)을 찾아와 지은 시가 걸려 있고, 장성군 북일면 박산리에 서능 정려비문도 박순이 지었다. 글씨는 옥봉 백광훈이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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