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산의 역사인물과 문화유적> 연재 제6회 칠계 김언거와 퇴계 이황과의 인연

  •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5.05.19

제6회 칠계 김언거와 퇴계 이황과의 인연

- 풍영정 風詠亭 (2)

 

 

 

풍영정에는 칠계 김언거(1503-1584)와 퇴계 이황(1501-1570)과의 인연을 알 수 있는 편액이 하나 있다. 주세붕과 이황의 차운 시가 적힌 편액이 그것이다. 주세붕의 시 제목은 ‘차규암풍영정운경정칠계선생 次圭庵風詠亭韻敬呈漆溪先生’이고 이황의 시 제목은 ‘차 次’이다.

 

그런데 주세붕의 시는 제목부터 심상하지 않다. ‘규암의 풍영정 시에 차운하여 삼가 칠계 선생에게 드리다.’이다. 규암은 송인수의 호이다. 그렇다면 주세붕이 송인수의 시를 차운하여 지은 것이다. 주1)

 

그러면 주세붕의 시를 살펴보자.

 

행할 만하면 행하고 떠나야 하면 떠나려니

얻지 못해도 기쁘게 여기는데, 잃었다고 하여 어찌 근심하랴?

대낮에 안개와 노을이 서석산에서 일어나고

푸른 봄날에 갈매기와 백로가 평평한 모래사장에서 즐겁게 노네.

 

可行行又可休休 가행행우가휴휴

得未爲欣失豈愁 득미위흔실개수

白日煙霞生瑞石 백일연하생서석

靑春鷗鷺樂平洲 청춘구로낙평주

 

목욕하고 돌아가며 시 읊는 곳에 바람이 먼저 이르고

술 취하여 잠 자려할 때 손님은 머물지 않네.

산수의 끝없는 경치를 앉아서 생각하니

몇 사람의 아름다운 시구가 오래토록 감동케 하네.

浴歸詠處風先至 욕귀영처풍선지

醉欲眠時客不留 취욕면시객불류

坐想湖山無盡藏 좌상호산무진장

幾人佳句動千秋 기인가구동천추

 

 

주세붕(周世鵬 1495 -1554)은 자는 경유 景遊, 호는 신재 愼齋로서

1541년에 풍기군수 豊基郡守가 된 후 1543년에 주자 朱子의 백록동서원 白鹿洞書院을 모방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

白雲洞書院을 건립하고 안향(安珦 1243-1306)을 배향했다.

 

그는 1545년에 성균관 사성에 임명된 후, 도승지·호조참판을 역임하고 1549년 황해도관찰사로 나갔다가 뒤에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 등에 임명되었다.

 

그러면 주세붕은 광주에 와서 풍영정을 보고 이 시를 지었을까? 아니다. 아마도 김언거가 보여준 풍영정 시첩에서 규암 송인수의 시를 보고 차운한 것 같다. 주2)

 

다음은 퇴계 이황의 시이다.

 

차 次

 

 

속세가 소란하여 쉴 수가 없었더니

가슴속에 많은 걱정이 차곡차곡 쌓였어라.

고향에 새로 집을 짓는 그대에 감동되어

호수가의 밭이 옛날 모래사장을 갈던 나를 생각하게 하네.

 

風塵擾擾不能休 풍진요요불능휴

襞積胷中萬斛愁 벽적흉중만주수

枌社感君新結屋 분사감군신결옥

湖田憶我舊耕洲 호전억아구경주

 

 

도연명처럼 돌아가려 해도 오히려 떠나기 어렵고

전공 錢公처럼 자퇴自退를 생각하다가 항상 스스로 머물렀네.

후일에 서로 만나면 함께 꾸짖을 만하구나.

해마다 좋은 시절을 헛되이 지키지 않았으니.

 

 

欲歸陶令猶難去 욕귀도령유난거

自退錢公常自留 자퇴전공상자류

異日相逢俱可罰 이일상봉구가벌

年年虛負好春秋 년년허부호춘추

 

1수는 김언거가 풍영정을 지은 것을 찬미하고 2수는 물러나려 함에도 속세에 머물고 있는 퇴계와 칠계 두 사람 모두 꾸짖을 만 하다고 읊고 있다.

 

여기에서 김언거와 이황의 인연을 알아보자. <퇴계집>에는 두 사람의 인연을 알 수 있는 글과 시가 여러 개 있다. 특히 <퇴계집> 권43에는 이황이 1548년에 지은 ‘ 발서주경유제김계진시첩후 跋書周景遊題金季珍詩帖後’글과 1552년에 지은 ‘서김계진풍영정시첩후 書金季珍風詠亭詩帖後’글이 있다. 주3)

 

그러면 이황이 1548년에 쓴 김언거의 시첩 발문의 요지를 살펴보자.

 

 

나의 벗 김언거는 서울에서 같은 동네에서 세 들어 살았다. 김언거는 고향에 풍영정을 지었다고 하면서 여러 사람이 지은 시를 보여주어 나도 화운하였다. 이후 김언거는 1546년에 상주목사로 나갔는데 그 고을에도 풍영루가 있었으니 우연히도 김언거 고향집의 정자와 이름이 같

아 기이하게 여겼다.

 

그런데 김계진이 단양군수로 있는 나에게 안부편지와 시첩을 보내왔다. 읽어 보니 주세붕의 차운시와 발문이 있었다. 김계진의 시첩들을 읽어보니 작품들이 너무나 훌륭하여 나에게 더 무엇을 기대하겠는가? 그렇지만 고향 광주의 풍영정과 상주 고을의 풍영루가 우연히 합치한 것은 풍영의 즐거움을 얻고자 함이 아니겠는가. 그러려면 마땅히 극기복례하여야 할 것이다.

 

이황은 서울 서소문 근처에서 살았다.주4) 그런데 김언거도 이황과 같은 동네에서 살았다.

 

이황은 1548년 여름 단양 관사에서 위 김언거 시첩 발문을 썼다. 1548년 1월에 단양군수로 발령이 나서 7개월 정도 근무할 무렵이었다.

 

그런데 이황은 그 해 10월에 풍기군수로 발령이 난다. 이황이 형 이해가 충청도관찰사가 발령이 나서 충청도 관할인 단양군수 자리를 피하고자 함이었다.

 

1549년에 이황은 단양에서 풍기로 부임하던 길에 상주를 찾았다. 공교롭게도 김언거는 자리를 비우고 없었다. 그래서 이황은 김언거를 그리워하면서 풍영루 차운 시 한 수를 지었다. 주5)

 

풍영루 시에 차운하다. 次風詠樓韻

 

내가 찾아왔는데 그대는 없고

성곽에 달빛만이 환히 밝구나.

꿈길에 산이 겹겹 가로막았고

시름겨운데 풀은 돋우려 하누나.

我來君不在 아래군부재

城郭月猶明 성곽월유명

夢裏山重阻 몽이산중조

愁邊草欲生 수변초욕생

 

 

벗을 찾아 왔는데 벗은 없고 성곽에 달빛만 환히 비친다. 당나라 시인 두보는 이백을 그리워하며 ‘몽이백 夢李白’이라는 시를 지었다. 이 시에서 두보는 ‘지는 달빛이 대들보에 가득하니, 오히려 그대 얼굴을 보는가 하여라.’ (落月滿屋樑 猶疑見顔色 낙월만옥량 유의견안색)라고 하였는데 한시 漢詩에서 달빛은 벗의 얼굴을 그린다는 이미지를 담고 있다.

 

 

추위 남아 봄은 아직도 쌀쌀하고

병든 몸인데 밤은 오히려 맑구나.

풍영루 시에 자세히 화운하노니

그대의 정자 이름도 풍영정이었지.

 

餘寒春尙峭 여한춘상초

病骨夜還淸 병골야환청

細和州樓句 세화주루구

家亭賞共名 가정상공명

 

퇴계는 추운 밤에 풍영루에서 김언거의 정자가 풍영정이었음을 다시금 상기하고 있다. 주6)

 

한편 퇴계와 칠계는 1552년에 다시 서울에서 만난다. 당시 벼슬은 이황은 홍문관 부응교를 거쳐 성균관 대사성이었고, 김언거는 사헌부 헌납이었다. 주7)

 

이 때 김언거는 이황에게 풍영정 시첩을 또 보여주었는데 화운한 자가 무려 수 십 여명으로 당대의 문장가들이었다. 이황은 이 시첩을 보고 감상 글을 쓰고 나서 시첩을 김언거에게 돌려주었다. 주8)

 

이후 이황은 김언거가 1553년에 연안부사로 갈 때도 송별시를 써 주었고, 예쁘게 핀 복사꽃을 보고는 김계진을 그리워하는 시를 짓기도 하였다. 주9)

 

말년에 두 사람은 모두 고향으로 돌아간다. 칠계는 1560년에 광주로 낙향하였고 퇴계는 1569년에 안동으로 물러난다. 그런데 1570년 3월에 퇴계이황은 고봉 기대승에게 칠계 김언거의 안부를 묻는 편지를 보내는 정겨움을 보였다. 당시에 기대승은 광주에 낙향 중이었다.

 

1570년 3월 21일의 퇴계의 편지를 읽어보자. 주10)

 

김계진(계진은 김언거의 자임)을 때때로 만나 보십니까? 옛날 함께 어울릴 때에는 정이 깊었습니다. 지금 그에게 편지 한통을 썼는데, 만약 함형이 사람을 시켜 스스로 그에게 전했다면 그만이겠습니다만, 만약 그대에게 갔다면 번거롭더라도 전해 주십시오.

 

풍영정에서 이렇게 퇴계 이황과 칠계 김언거의 만남을 음미할 수 있다니 너무 즐겁다. 전라도 선비와 경상도 선비의 만남을 엿볼 수 있다니 정말 기쁘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풍영정에 걸려 있는 김언거를 비롯한 네 사람의 연작시, 소세양 ․ 정사룡 ․ 신광한의 시, 고경명과 유희춘의 시, 권필과 이안눌의 시 편액들을 모두 감상하지 못한 점이다. 다음 기회에 감상하련다. 아울러 기회가 된다면 풍영정에서 정자문학 강좌도 하고 싶다.

 

사진 1. 주세붕과 이황 풍영정 차운시

2. 퇴계 이황의 ‘풍영루 시에 차운하다. 次風詠樓韻’ 시

 

 

주1) 규암 송인수의 시 1수의 운은 휴 休, 수 愁, 주 洲 이고 2수는 류 留, 추秋인데 주세붕이 이 운을 차운한 것이다. 그런데 풍영정에 걸린 규암 송인수의 시는 제목이 ‘계진정’이었는데 주세붕의 시는 ‘풍영정’인 것이 특이하다.

 

주2) 퇴계 이황은 1548년에 지은 跋 書周景遊題金季珍詩帖後(발 서주경유제김계진시첩후)에서 상주목사 김언거가 단양군수 이황에게 시첩을 보내왔는데 여기에 주세붕의 시가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퇴계생각> p115)

 

주3) <퇴계집> 권43의 두 개의 글은 이황과 김언거의 인연을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이상하의 저서 <퇴계생각> P 113-126에 자세한 설명이 있다.

 

주4) 서울시 덕수궁 근처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화단에 가면 이황이 살았던 곳이라는 표석이 세워져 있다.

 

주5) 풍영루 시는 <퇴계집 속집> 권2에 원문이 있다.

 

주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8권 경상도 상주목 편에 보면 풍영루에 대한 내역이 자세히 나온다.

 

주7) 명종실록 1552년 2월14일자, 4월4일자, 6월 18일자, 7월 11일자 참조

 

주8)‘서김계진풍영정시첩후 書金季珍風詠亭詩帖後’ 글은 1552년 중양절 重陽節 (음력 9월9일) 하루 전에 한양의 이황 집에서 썼다.

주9) 이상하, 퇴계생각 p124-126 참조

 

주10) 김영두 옮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p 313 참조

 

 

< 참고문헌 >

 

o 광산김씨 칠계공 문중, 홍순만 번역, 풍영정 시선, 호남문화사, 2007

o 광산김씨 칠계공 문중, 칠계유집, 호남문화사, 2004

o 광주직할시, 누정제영, 태양사, 1992

o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왕조실록 홈페이지

o 김세곤, 퇴계와 고봉 소통하다, 온새미로, 2013

o 김세곤, 호남정신의 뿌리를 찾아서, 온새미로, 2010

o 김세곤, 청백리 송흠, 온새미로, 2011

o 김영두 옮김, 퇴계와 고봉, 편지를 쓰다. 소나무, 2003

o 이상하 지음, 퇴계 생각, 글항아리, 2013

o 이일영 역, 국역 지지당 유고, 효성사, 1992

o 이황, 퇴계집,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o 신증동국여지승람, 한국고전번역원, 한국고전종합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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